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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벌써 한주가 다 가고 내일부터 주말이 시작됩니다. 한 주간 고생 많으셨고 주말 동안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과 이 조약으로 인해 발생한 임오군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꿈꾸며 일으킨 정변인 갑신정변에 대해 포스팅해보겠습니다.

 

갑신정변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기존에 권력을 갖고 있었던 민씨는 청나라에 군란을 잠재워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이때 청나라는 형제의 나라를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3,000여 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군란을 진압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집권자였던 대원군을 청나라에 초청한 뒤에 납치하였습니다. 민씨는 다시 권력을 잡지만 청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글에서 조선은 이때 청나라와 '조청 상민 수륙무역장정'이라는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전문에 조선을 청나라의 '속방'이라고 쓰여있었습니다. 사실상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 당시 대원군을 몰아내고 다시 권력을 잡은 민씨는 자신이 권력을 다시 잡게 도와준 청나라가 조선을 크게 침해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본인들의 사리사욕만 채운채 불평등 조약에 순응하였습니다. 또한 청나라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개화운동이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 보고 개화당을 탄압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옥균은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청군을 몰아낼 계획을 하게 됩니다.

 

박영효는 광주 유수로 좌천되자 그곳에서 약 500명의 사람을 모아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고, 윤웅렬은 북청 지역의 약 500명의 사람을 모집하였습니다. 서재필 등 14명의 사관 생도가 갑신정변의 지휘를 맡았고 약 43명으로 이루어진 비밀 무장조직을 만들어 신복모에게 지휘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때마침 1884년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안남을 둘러싸고 긴장감이 커지게 되었고 조선에 주둔 중이었던 3000명의 청나라 병력은 1500명만 남기고 안남 전선으로 이동시킵니다. 1884년 8월에 발발한 청불 전쟁에서 전쟁상황이 청나라에 불리하게 전개되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김옥균과 개화당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 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개화당은 고종과 왕후를 경우궁으로 옮기고(기존에 창덕궁에 거처가 있었지만 청나라의 공격에 방어하기 수월한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수구파의 핵심 세력이었던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민태호 등을 처단하였습니다. 뒤이어 신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고 정부의 핵심 요직은 개화당 구성원으로 채워졌습니다. 개화당의 신 정부는 1884년 12월 5일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공포하였습니다. 갑작스러운 개화당의 정변에 놀란 청나라는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을 경우궁으로 보내 민씨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개화당을 몰아낼 계획에 대해 전하였습니다. 청나라의 계획대로 왕후는 경우궁이 좁아 불편하여 다시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하였고 고종 또한 그 생각을 지지하였습니다. 김옥균은 창덕궁으로 환궁할 경우 청나라의 공격에 취약해질 것을 우려하여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왕과 왕후의 지속적인 요청과 정변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준 일본 공사 다케조가 일본군과 힘을 합치면 창덕궁에서도 청군의 공격을 방어해 낼 수 있다고 장담하여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개화당은 새로 수립한 정부의 지침인 '혁신 정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습니다. 이 혁신 정강에는 개화당의 개혁 정치 목적과 내용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있습니다. 

 

12월 6일 오후 청군은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을 들어왔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개화당의 병력을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였고 청군으로부터의 방어를 도와준다던 일본군은 전투가 일어나기 전 배신하고 철수해버렸습니다. 이렇듯 김옥균과 개화당의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이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전투를 지휘하였던 홍영식, 박영교 등 사관생도들은 청군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나머지 개화당 세력은 민씨의 수구파에 의해 숙청당하게 되고 개화당을 몰락하게 됩니다. 비록 3일 만에 갑신정변은 진압되고 개화당 세력은 몰락하였지만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첫 번째 근대화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이후의 민족주의 운동은 갑신정변의 뜻을 계승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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