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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즐거운 주말입니다. 이전 포스팅에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꿈꾼 갑신정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비록 3일 천하로 끝나긴 했지만 조선의 근대화와 외세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위한 최초의 근대화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탐관오리의 횡포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였습니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이후 곡식의 외부(일본) 유출로 인한 가격 폭등과 값싼 공산품의 유입으로 인한 조선의 수공업 몰락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가고 있었고 정부는 내부 세력의 봉기와 외세의 지속적인 수탈로 정상적인 역할을 할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고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들의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입니다.

 

동학농민운동

'동학'은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습니다. 봉건사회를 반대하고 평등한 세상을 원했으며 반외세사상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사상은 사회 하층민인 농민들을 중심으로 그 교세가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동학의 확산이 부담되어 동학을 사교로 금지하고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였으며 동학교도들을 탄압하였습니다. 하지만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의해 동학은 더욱 확산되었고 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892년 말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였으며 백성들에게 엄청난 양의 세금을 불법적으로 수탈해갔습니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억울한 사정을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였고 동학 접주인 '전봉준'을 대표로 조병갑에게 두 차례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은 동학 접주인 동지들과 봉기를 약속하게 됩니다. 1894년 2월 10일 전봉준은 봉기하여 고부군아를 습격하여 불법 수탈된 곡식을 찾아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해산하였습니다. 조병갑은 간신히 피해 이를 정부에 보고하게 되고 조선정부는 조병갑 대신 새로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안핵사를 맡은 이용태가 사후처리를 빌미 삼아 동학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봉준은 김기범, 손화중, 최경선 등 동학접주들과 함께 1894년 4월 탐관오리의 숙청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고 봉기를 일으켰습니다.(제 1차 동학농민운동) 이 창의문을 보고 근방의 읍에서 농민들이 호응하였고 10일 만에 1만 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황토현에서 대패를 당하고 기세를 몰아 동학농민군은 정읍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이후 발생한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전봉준을 필두로 한 동학농민군은 전주성까지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다급함을 느낀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를 알게 된 일본은 텐진 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의 개입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됩니다. 동학군은 더 이상의 전투와 희생을 할 수 없었기에 관군과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전주화약'을 맺었고 농민군을 해산하였습니다.  이 후 집강소를 설치하여 동학교도가 각 읍의 집강이 되어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동학군이 해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군대를 파견한 청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운이 돌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이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을 접하게되자 전봉준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다시 한번 봉기하기로 결심합니다.(제 2차 동학농민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고 전라도 삼례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가 11만에 이르렀습니다. 정부의 관군과 일본군에 대립하여 동학군은 각 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군의 신식 군대와 무기에 고전을 하던 중에 '우금치'에서 운명을 건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일주일에 40~50회의 격전을 펼친 끝에 일본군에 참패한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습니다. 결국 후일을 기약하며 농민군은 해산하였고 전봉준과 김덕명, 최경선은 재기를 계획하던 중 관군에게 잡혀 참수를 당하게 되고 결국 두 번에 걸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동학농민운동은 반봉건적 사회 개혁 운동이었으며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민족운동이었습니다. 또한 농민 중심의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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