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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점점 날씨가 더워지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한국의 근현대사에 여러 사건들 중에 굵직한 사건들만 모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첫 시간으로 병인양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66년(고종 3년) 1월 초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한국인 천주교 8천 명을 학살하는 병인박해를 일으킵니다. 이때 탄압을 피해 탈출한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펠릭스 클레르 리델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인 피에르 로즈에게 조선의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리고 보복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2차례 조선을 침략하려 했다 실패하였던 프랑스는 조선을 침략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프랑스의 실제 목적은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조약을 맺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9월 18일 리델 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의 안내로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을 통과하여 서울 근교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해도와 한경 연안에 포대를 강화하고 의용군을 모집하여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이를 본 프랑스 군함은 강 류만 측량을 한 뒤에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로즈는 다시 한번 전함 3척과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다시 한번 조선을 침략합니다.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바탕으로 강화를 점령하고 서울에 이르는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고 무기, 서적 등을 약탈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를 죽이고 신도들을 학살하였으니 그 책임자를 엄벌하고 전권 대신을 파견하여 통상조약을 맺어야 한다며 협박을 합니다. 조선은 이경하, 신헌, 이기조, 이용희, 한성근, 양현수 등 무장들에게 양화진, 통진, 문수산성, 정족산성을 수비하도록 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다 미리 잠복해있던 한성근의 부대에게 참패를 당해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후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군은 정족산성을 공격하다가 미리 잠복하고 있던 양현수의 군대에게 또다시 패배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아군의 사상자는 1명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50명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프랑스 측의 기록에는 전투에서 3명이 죽고 35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패배로 프랑스 군은 사기가 저하되고 결국 로즈 제독은 철수하게 됩니다. 이때 프랑스군은 많은 서적과 자료 금, 은 등을 약탈해 돌아갔습니다. 이때 약탈한 많은 서적과 자료 등은 훗날 유럽인들이 한국과 아시아를 연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치른 뒤 흥선대원군은 국민들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1871년 4월에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만드는 등 쇄국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도 훨씬 심해지게 됩니다. 

- 신미양요 : 조선과 통상을 하고싶었던 미국은 조선에 지속적으로 배를 보냈고 이때 서양의 배가 지속적으로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싫었던 조선의 국민들은 대동강에서 미국의 배인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게 됩니다.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 삼아 프랑스와 동일하게 강화도를 침략하여 대대적인 함포사격으로 위헙하며 조선과 통상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무기 기술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거센 조선의 저항과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미군은 철수하게 됩니다.

- 척화비 : 1871년에 건립되었으며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라고 쓰여있습니다. 이 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른 뒤 흥선대원군이 외세의 침략을 경계하고 쇄국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 세운 비석입니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고, 개국을 하자 철거되거나 파묻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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